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라는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다니엘(Liam Neeson)이 아들인 샘(Thomas Sangster)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해 묻는다.

"니가 좋아하는 그녀.... 혹은 그가(she or he)......."

놀랍게도, 아버지는 아들이 좋아하는 이가 여자라고 특정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당연하게도 만드는 사람과 만들어지는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 2003년 즈음의 영국에서는

최소한 이성애가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었으며, 개인의 성적 취향을 부모님조차도 자연스레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영국이 매우 특이한 나라라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동일한 비율을 이루며 살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저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내재화 하고 있었을 뿐이지 않을까? 그런데 왜,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일까?


이성애자로 만들어지는 사람들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는 이성애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법칙이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남자)아이에게는 '좋아하는 남자(여자)친구' 가 있을 거라 미루어 짐작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애인'이라는 말은 성별에 따라 '여자(남자)친구' 라는 말로 간단히 치환된다. 인기몰이를 하는 남자(여자) 배우에겐 어떤 여자(남자) 배우가 이상형인지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물어보며, 만약 그 배우가 동성애자라면 그러한 질문이 곤란하고 껄끄러울 것이라는 고려는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어떠한 사람이 서울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얘기를 풀어놓는데 알고 보니 서울 외 지역의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또, 비흡연자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주는데 맞춰 신나게 수다를 떨었더니, 그 상대방이 흡연자라면 얼마나 민망할까. 똑같은 가정인데, 어찌하여 동성애자에 대한 고려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일까? 왜, 동성애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받아야 하는 걸까?


여러 가지 추정치들이 난무하고 있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내의 동성애자가 1500만명에 이르러 미국 내 아시안 인구

(1200만명)를 추월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또한 스페인, 캐나다,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등에서는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있으며, 미국 내 몇 개 주에서도 동성 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약 3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동성애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우리 주위의 100명 중 6명 정도가 동성애자라는 의미다. 이는 인천광역시 인구(272만 2786명)와 비슷한 수준이다(2008년 1/4분기 기준). 당연하게도 이 숫자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

동성애자는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되는 걸까?



                                                              (영화 '후회하지 않아'의 스틸 컷.)

호모포비아가 지배하는 사회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동성애자가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큰 이유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동성애자 스스로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성향을 밝히기가 어려운 사회 풍조의 탓이 클 것이다. 그 편견을 총체적으로 종합해보자면, 동성애자는 잠재적 성병 보균자이며, 문란한 성생활을 즐길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애정을 표현하여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사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말이 되지 않는 얘기다. 동성애자들의 성애(性愛)를 통해 에이즈 등의 바이러스가 생겨난다는 믿음은, 중세 이전의 사람들이 벌레가 먼지에서 생겨난다고 믿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성애를 생각하며 바로 성교(性交)를 떠올리지 않듯, 동성애 자체가 문란함으로 여겨지는 것도 분명한 오해이며 오류다. 또한, 동성애자들이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라는 믿음은 순진한 자기애의 잘못된 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시쳇말로 도끼병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찬찬히 들여다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편견들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가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의 경우,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에 당황을 느끼며 그에 대한 포용에 대해 고민을 하게 마련인데, 모두가 이성애자라고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 동성애라는 극도의 이질성은 포용의 범위를 넘어서는 '공포'로써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증)의 정체다.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를 희망하며


만약, 모든 이들이 똑같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모두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 같은 직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며, 유사한 음식을 먹으며 별반 다를게 없는 사랑을 펼쳐나간다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지 않는가? 이러한 숨막히는 상황을 해결해줄 열쇠가 '다양성'이다. 4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의 수와 같은 40억 개의 삶이 우리 주위엔 존재하며 그 중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와 온전히 같을 수 없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성애와 동성애로 굳이 나누어 생각하는 것도, 이 '다양성'이라는 틀에서 보면 그저 우스운 일일 뿐이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그저 사랑의 한 방식일 뿐이며, 우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를 건강하게 지켜나갈 의무가 있는 이들로서, 다른 이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만 한다.


인간이 본래 이성간의 결합을 전제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지금 본인의 생활 방식 중 원래 인간이 만들어진 방식대로인 것이 몇이나 되는지에 대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문인 가상의 틀을 만들어놓고 그것이 절대불변의 진리인냥 떠받들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올바른 일일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식활동을 통한 자손번식을 하지 않으면 의미를 잃어버릴 만큼 단순한 존재였나? 앞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40억 개의 삶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이유에 대해 누구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모든 일을 자신의 기준에만 맞춰서 생각하는 것은 편협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성애자가 , 모든 소수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한 모 연예인이 지극히 이성애자를 중심으로한 컨셉의 '막장' 케이블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의문이 들어 그에게 왜 그 방송에 출연하는 지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그의 답변은 참 슬펐다. 그는 '자신이 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고 얘기했다. 그랬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케이블과 공중파를 통틀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 한 그에게 손을 내미는 곳은 몇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막장' 이든, '이성애 중심의 컨셉' 이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 사회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다는 것이 이렇 듯 모진 결과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 대부분은 모두 다 어떤 부분에서는 소수자(비 기득권자)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수도권 외 출신이라면, 비명문대 재학생이라면 각각 남성에 대해, 수도권 출신에 대해, 명문대 재학생에 비해 소수자라 할 수 있다. 이성애자에 대해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동성애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소수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된다면, 동성애자가, 모든 소수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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