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대에서 특강중인 이소연씨 copyright by 경향신문)

 5월 12일, 이소연씨가 서울여대가 마련한 '미래를 여는 지성 아카데미' 특강에 '떴다'. 그는 세계에서 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우주의 드넓은 품에 안겼던 그야말로 역사적인 인물이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한국 우주사에 길이 남을 흔적을 남긴 이답게 지구로 귀환한지 1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이곳저곳의 행사와 방송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여대에서 기획한 이번 특강도 그런 행사 중 하나인 듯싶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여성' 재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성공담을 설파했다. 그는 고교 이후에 남자들에 둘러싸여 생활해오다보니 여대가 매우 낯설다며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고 20여년을 산 것 같다”고 운을 뗀 후, “자신이 여자니까 차별당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면 이미 패배자”라며, “자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잊고 사는 게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당차게 밝혔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자신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임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이면 성공할 수 없다?


 유교 사상이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수치상이나 질적으로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공과 동일시되는 고위직 공무원이나 기업 CEO의 경우 여성의 존재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다. 이소연씨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 받으려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에 임하라는 의미로 발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말에서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이 사회가 여성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고 있으며,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남성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남성들은 오히려 그들의 남성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그들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긍정함으로써 사회생활의 성공 루트를 만들어나간다. 자신의 가족과 인간관계를 제쳐두고 자신의 조직 단합대회에 참석해 의리를 지키는 '사나이'는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한두 걸음 앞서고 있는 이를 이르는 또 다른 말이지 않은가? 하지만 여성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남성적 가치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에 맞춰(혹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거쳐 가는 군대 문화에 맞춰) 최적화 돼 있는 이 사회에서 여성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그들의 삶의 궤적을 상당부분 남성들의 문화에 맞춰야만 한다. 술자리에 참석해 남자 직원들의 비위를 맞추는 '꽃'이 되거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마저 잊고서 '명예남성'이 되어 남자 직원들의 음담패설에 맞장구를 치는 역할을 마다해선 안된다는 거다.

꽃이 되거나, 남자가 되거


 이소연씨의 이야기는 '일' 측면에 한정되어 있는 것인데 왜 그렇게 확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만 잘하면 과연 성공할 수 있느냐고. 물론, 업무 면에서만 뛰어나도 일정 이상의 인정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뛰어난 업무능력에 국한된 이들은 '일벌레'라며 조롱받기 일쑤이지 않은가. 특히 여성이 뛰어난 일처리 능력으로 단연 돋보인다면, 이른바 '독한 여자' 취급 받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다. 결국, 사회에 진출한 여성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느냐, 사회적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버리느냐의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시대의 '사나이'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하는 것인데 말이다.

 

 사실, 이것은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성들 중에서도 흔히 이야기되는 '사회 부적응자', 다시 말해, '가짜 사나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들 역시 능력 여하와 상관없이 이른바 '사회생활'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그런데, 그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상사가 부르면 재빨리 뛰어나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음날의 근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동료들과의 우정(?)을 나누는 것이 과연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일까. 그 조직의 구성원들을 괴로움으로 내모는 것이 진정 ,'사회생활'이라 할 수 있는가? 결국,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회생활을 강요하는 이 사회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이소연씨 : http://blog.daum.net/rlawogur119)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전가해선 안돼


 이소연씨는, 여자라는 이유로 어려운 일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면서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심리에 대해 일갈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은 그러한 일들에 대해 당당하게 맞섰으며, 결국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른바 '성공한 사람'으로서, 성공하기위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버렸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얘기해서는 안된다. 다른 이들에게 성공을 위해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라고 얘기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것은, 성공이란 열매를 위해 이 사회의 여성들만이 치러야 하는 기회비용을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왜곡된 사회구조를 인식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 선행된다면 성공할 수 있다며 이 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가려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소연씨는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고, 그저 한 명의 '한국사람'으로 생각해달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성공한 여성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가 포기한 것들을 다른 이들도 포기하라고 무책임하게 말하는 대신, 그가 여성으로서 성공하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후배들이 포기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틀로 똑같은 조건을 강요하여 많은 이들을 괴롭게 하고 탈락시키는 사회 대신에, 다양한 이들이 모여 그들의 다양성을 지키며 진정으로 조화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것. 그것이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이 해야 마땅한 일이며,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일 것이다.




관련 기사 :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121801265&code=100203

※ 따옴표로 처리되어 있는 이소연씨 발언은 모두 상기 기사에서 따온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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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헌법 제 39조 1항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라고.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저 조항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이런게 아닐까?
별다른 결격 사유가 없는 대한민국 국민은 군대를 가야 한다는 것.


(논산 훈련소 종합각개전투훈련중인 훈련병의 모습)

자. 그렇다면 이 결격사유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보통의 경우 이 사회에서는 통칭 '신체검사' 라고 불리우는
것을 실시하여 신체적, 정신적으로 군복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이들을 가려낸다. 현재 1~3급을 받은 이들은
현역병 징집대상이며, 4급은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수행하고, 5급과 6급은 징집대상에서 제외되며 군복무를
직접적으로 수행하지 않아도 되게 돼 있다.

언뜻 보기엔 전혀 문제가 없어보인다. 국가라는 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국가에서 적당한 검사를 시행하여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의무를 부여하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에도 사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문제가 있다. 저 '신체검사'의 대상은 오직 생물학적 남성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남자만 군대가는 현실은 확실히 옳지 않다. 하지만

통계학적으로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삼척동자도 쉬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세상의 반은
남자이고, 세상의 반은 여자라는 것(물론 이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글의 문맥을 해칠
염려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겠다.)이다. 돌려서 다시 이야기하면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없고, 심각한 정신질환으로부터 자유로우므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에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는 사람들 중에
딱 반절 정도만 군입대라는 국방의 의무 앞에 노출이 된다는 얘기다. 이게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인가?
단지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미성년자라는 굴레를 벗고 세상으로 뛰쳐나와 자신의 꿈을 막 펼쳐보려는 나이에
군대로 끌려가야 한다는 것. 이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을만큼 불합리하다
그러나, 그러니까 여자도 군대를 가야한다. 그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워야 한다는게 올바른 해결책인가?

자, 일단 여자들도 군대에 가야한다. 그들도 병역의 의무를 져야한다는 논의의 출발점에 대해서 살펴보고 싶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됐을까?

보기 1. 군대가 너무 즐겁고 좋은 곳이라 남자들만 체험하는 것은 불공평하므로
보기 2. 군대가 인생의 고비이자 삶의 장애물인데 남자들만 당하는 것은 불공평하므로

진지하게 1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라는 법은 없지만, 아마 세간의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심경은 2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군대라는 곳에서는 많은 자유를 속박당하며 그동안 살아온 현실로부터 강제로 격리되고
원하든 원치않든 상명하복의 원칙 속에서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군대는, 직업 군인을 꿈꾸는 이들을 제외한 이들에게
약 2년여의 시간을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상관 없는 환경 속에서 보내게 한다
. 불공평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비슷한 선상에서 출발한 여자들은 취업에 대한 것이든 학업에 대한 것이든 경력에 관한 것이든 저만치 앞서
나아가고 있는데 남자라는 이유로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사실 군대에 있는 동안은 제대로 지켜보기
조차 힘들다. 이를 두고 어찌 불공평하다하지 않다 할 수 있겠는가?


(군인들의 일용할 양식 건빵. 출처 : http://blog.naver.com/stirrup9)

결국, 문제는 이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자, 이러한 억울함에 대해서 긍정을 하였으니 이에 대한 해결책이 있어야 마땅하겠다. 어떠한 해결책이 있을 수 있을까?
일단, 많은 이들이 얘기하듯 여자도 군대를 감으로써 이러한 불공평함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단절되고 군대문화를 경험하며 소위 '뺑이를 쳐야'하는 것이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게 될테니까. 여자들은 군대를
다녀옴으로써 병역의무를 수행한 '진정한 국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될지 모르며, 남자들은 더이상
상대적 박탈감에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해결 방법인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각종 학대를 당하며 자라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나중에 성인이 되어 그가 다른 이들과 어렸을 때의 일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자신처럼 부모님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란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는 억울함을 느꼈다. 단지 자신은 운이 없어서 부모님을 잘못 만났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겪지 않는 학대를 견디며 자라야 했고, 그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은 평생을 괴로워 하며 보내야
할지 모른다. 자,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아마,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건전한 사회를 위한 노력
을 하여, 학대 받는 아이를 위한 사회적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자신과 같은 불행한 이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만약, 모든 아이들이 학대받음으로써 그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게 해야한다는
이가 있다면 대부분의 이는 그 의견이 당치도 않은 궤변이라 생각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 논의를 군대 문제에 관해서는
적용할 수 없을까? 학대를 군대로, 학대받은 이를 군대를 다녀온 이로 치환하면 자연스레 '모든 아이들을 학대해야 한다'
는 궤변은 '모든 여자들도 군대를 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바뀌어 버린다.

-1 에 -1을 하면 -2가 될 뿐이다

앞서 든 예가 다소 과격하다보니 꼭 그렇게 예를 들어야겠냐며 반론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맥락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지 않은가? 결국, 현재의 좋지 않은 상황을 다른 사람도 좋지 않은 상황을 겪게 함으로써 해결하려 한다는 것은
군대가 아닌 다른 상황에 대입해보면 명백한 오류이며 궤변이다.
하지만 어째서 군대 논의에서는 이러한 일반론이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에는 사실, 남자들만 군대를 가도 불공평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남자들이 의무를 지는만큼, 남자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권이 갈수록 신장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평등사회에 대한 모든 이들의 염원이
사회 제도로 드러나면서 기존에 누리던 '남성들만의 권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도 남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많지만, 이전에 비하면 굉장히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니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권리는 가면 갈수록 희미해
지는데, 군대라는 '의무'는 너무나도 또렷하게 남아 남자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박탈감이 군대라는 논의에서
일반론의 대입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1에 -1을 더해도 -2가 될 뿐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사라질지 모르지만, 결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 +1이라 할 수 있는 대안이 없지 않느냐고 주장한다면, 그에 대해 진지한 탐색을 해보긴 하였느냐고 되묻고 싶다.
사실 근본적인 대책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모병제로의 전환이다. 현재의 징병체제가 모병제로 전환되고, 모병에 있어
여자와 남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한다면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문제는 물론 시간의 단절, 자기 계발에 대한 장애와 같은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이 된다.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이 군대에 간다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물론, 모병제로의 전환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것도 뻔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서 궁극적 해결책으로 가는
길이 아닌 샛길로 빠진다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여성들이여 군대를 가라! 라고 외치기보다는
이토록 불합리한 상황을 방치하는 정부에 항의해야 한다.

모두가 구정물에 발을 담그는 대신 구덩이를 메우자

정부는 현 병력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에 대해 철저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며,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대북 관계를 정상화시켜 군축협상에 돌입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의 휴전협정을 종전선언
으로 이끌 수 있도록 최선을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노력을 해나가는 데 있어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이
부득이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 데 대해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현재도 일부 적용이 되고 있지만, 군복무에 대해
취업 후 일정 경력으로 인정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며, 군복무 중에도 자기 계발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해야할 뿐 아니라, 전역 후 사회의 재진입이 용이할 수 있도록 합당한 교육 프로그램이 존재해야 할것이다.
또한, 신체적 정신적 결격사유뿐 아니라 양심적 거부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어떠한 이가 구정물이 고인 구덩이에 발을 담갔다고 해서, 모든 이가 그 물에 발을 담글 필요는 없다. 그저 그 물을 구정물이 아닌 깨끗한 물로 만들면 될 뿐이며, 근본적으로는 그 구덩이를 메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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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토로 한 '살인의 추억' 포스터)

군포 대학생 살인사건의 후폭풍이 여전히 거세다. 초기에 용의자 강호순의 신상명세며 각종 신변잡기에 쏟아지던 관심은
청와대가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용산 참사를 숨기도록 지시했다는 문건이 등장하며 또 다른 국면을 맞게됐다.
이제 그러한 문건이 존재한다 아니다의 여부는 논란이 끝이 난 모양이고, 그 문건이 과연 개인적인 불찰이냐, 아니면
청와대로부터 영향을 받은 권고의 하달이냐를 두고 공방이 치열하다. 정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후자 쪽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결과가 어찌되든 군사독재 시절의 여론 통제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곧 개봉을 앞둔 영화의 제목이 머리를 스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뭐라나.

이런 사회를 들썩이는 논란을 일으키는 군포 대학생 살인사건에 대해 필자는 조금 다른 견해에서 논의를 진전시켜보고자
한다. 어쩌면 필자가 사용하는 '군포 대학생 살인사건'이라는 통상적이지 않은 이름에서 이미 의도를 눈치 챈 이도 있을 지
모르겠다.

씨프린스호 사고 vs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논의를 진전시키기에 앞서 먼저 '이름짓기'의 위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이름을 짓는 것에는 마땅히 이름을
짓는 사람의 의도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최근 용산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이름 짓기만 해도 그렇다. 철거민의 과격한
시위가 사건의 원인이라 보는 이들은 '도심 테러', '용산 철거민 사태' 라 부르고, 경찰의 과도한 진압이 원인이라
보는 이들은 '용산 참사', '용산 철거민 살인집안사건' 이라 부른다.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사건의
본질이 다르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씨 프린스호 사건을 겪었던 여수 주민들이 태안에서 방제 활동을 벌이는 모습. 출처 : 연합뉴스)

이와 비슷한 예로 '씨프린스호 사고'와 '태안 기름 유출 사고'에서 드러난 작명 의도를 들 수 있다. 95년 여수 앞바다에서
발생한 '씨프린스호 사고'는 최근 발생한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자주 비교될 만큼 해양 생태계와 인근 해안의 주민들
에게 재앙으로 다가온 사건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분명 비슷한 사건인데 전자는 당시의 사고 선박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후자에는 사고 선박의 이름은 쏙 빠지고 사고가 난 인근 지역의 지명만이 나타나 있다.
덕분에 태안 사고의 선박 이름이 허베이호이고, 허베이호가 현대의 소유이며, 삼성중공업 소유의 크레인과 충돌하며
기름 유출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태안 기름 유출 사고'라는 이름에서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사고의 이름이
'의도적'으로 지어진 것인지, 우연히 그리 된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작명 기법'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군포 여대생 살인 사건 vs 군포 대학생 살인 사건

자. 이제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보자. 군포 보건소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 대학생이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연쇄 살인범은 남자였고, 대학생은 여자였다. 그리고 그에 대해 이렇게 이름 붙인다 '군포 여대생 살인 사건' 이라고.
여기서 하나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만약 이 사건이 '군포 대학생 살인 사건' 이라 이름 붙여졌으면 어땠을까?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대학생이다. 그렇다면 사실 '군포 대학생 살인 사건'이라고 이름 붙여도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라 생각된다. 왜일까?

한국 사회에서 대학생은 철저하게 행동하는 자였다. 민주 항쟁의 주인공이고,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을 주는
젊은 피였다. 하지만 여자 대학생은 어떠한가? 여대생은 항상 당하는 자였다.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촛불 시위에서 쓰러진 채 폭행당하는 존재였으며 연쇄살인의 표적이 되는 대상이었다. 그렇다. 여대생은 대학생이기
이전에 여자였으며, 이 사회의 남자들이 보호해야할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명쾌해진다.
왜 살인 사건의 이름 짓기에 '대학생', 이 아니라 '여대생'이라는 단어가 쓰이게 됐는지.


(영화 '아는 여자' 스틸 컷 중에서)

수동성의 이름으로 그들을 가두지 말라

남교수란 말은 없어도 여교수라는 말은 자주 쓰인다. 일반 남자 중고등학교는 결코 'OO남고'라는 식으로 이름이 지어지는
법이 없지만 대부분의 여자 중고등학교는 'OO여중, OO여고'라는 식으로 이야기 된다. 남대생이란 말은 대학생으로 대치
되지만, 여대생은 결코 대학생이라는 말로 완전히 대치될 수 없다.

이름을 짓는 행위에는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어떠한 의도가 담기게 마련이다. 특히 '여자'라는 이름의 수식어는 어떠한
대상을 수동적이고 소수의 힘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는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비교적 진보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언론의 인터뷰에서도 대학생 OO군과 여대생 OO양은 자주 구분이 되곤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 여자라는 이름을 수동성의 틀에 가두어서는 안된다. '군포 여대생 살인 사건' 이라는 이름 짓기는 자연스레
"연약한 여성을 죽인 연쇄살인마를 홍보해 가난한 서민의 죽음을 묻으려고 한 범죄행위(민주당 서갑원 부대표 - 2009년
2월 26일자 경향신문(4면) 보도 중에서)" 라는 담론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며, 여성이라는 존재를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할
유약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우리는 여대생이 쓰러진 채 폭력을 당했기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한 인격체가 무참한 공권력에
짓밟힌 것에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꽃다운 여대생이 연쇄 살인범에게 살해되었기에 분노하기보다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삶의 권리를 무참히 빼앗겼다는 데 분노해야한다.
언젠가 여교수라는 말이, 여대생이라는 말이 어색하게 다가올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생각을 가두는 그 수동성의 틀을 부숴버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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