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기본은 중립성이다. 중립을 잃은 언론은 말의 길을 좌우하는 그 고유의 역할을 실행해낼 역량을 잃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한 언론인께서 '언론인의 길은 항상 외롭다'라는 취지의 얘기를 하신 것도 아마
뼈가 시릴 정도로 중립을 지켜야하는 그들의 사명에 대한 것이 아니었겠나 싶다. 우리가 언론인 출신으로
잠시간의 유예도 없이 정치권으로 흡수되는 폴리널리스트(언론인 출신의 정치인)를 비난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중립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애매한가? 세상을 좌와 우, 선과 악으로 쉽게 분할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중간의 영역을 콕 찝어내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설사, 그 중심점을 짚어낼 수 있다고 해도, 그 지점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과연 '중립' 일까? 힘이 센 자가 9할이고 그렇지 못한 자가 1할일 때, 1할의 편에 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언론의 중립이다. 정치권력, 자본권력을 포함한 각종 권력에 굴하지 않고, 해야할 말을
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언론의 중립성이라 부른다.

신경민. 낙마하다.

2009년 4월 13일.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MBC뉴스데스크를 진행해온 신경민 앵커가 마지막 방송을 했다.
언젠가부터 MBC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자 김미화씨와 함께 교체 대상자로 검토되어오다가
최종적으로 교체가 확정된 것이다. 보통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방송을 계속 하는 것이 관례지만, 신경민 앵커는
13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뉴스데스크 진행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동안 많은 보수 매체에서 신경민 앵커의 언행을 비판해왔다. 청와대에서도 역시 그의 언행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이번 신경민 앵커의 교체는 겉으로는 "뉴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것(엄기영 MBC 사장)"이지만 사실상
보수 매체와 청와대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 기정 사실이다. 과연 그가 어떠한 이야기를 해왔기에
자신의 자리를 내놓아야 할 처지에 이러른 것일까?


(신경민 앵커)

신경민.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이번 보신각 제야의 종 분위기는 예년과 달랐습니다.
각종 구호에 1만여 경찰이 막아섰고요.
소란과 소음을 지워버린 중계방송이 있었습니다.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언론, 특히 방송의 구조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시청자들이
새해 첫날 새벽부터 현장실습교재로 열공했습니다.


이것이 2009년 새해 첫 뉴스데스크의 후미를 장식했던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였다. 이것 외에도 그의 많은 언행은
기존 딱딱한 말투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위의 멘트만 내뱉어대던 앵커에 익숙한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누가 뭐라해도, 새해가 시작되며 TV를 통해 전해들려왔던 박수소리와 각종 음향효과들은 그 당시 현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숨기기 위한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당시 언론 파업을 이끌던 이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만약 언론을 정치 권력이나 자본 권력에게 넘겨준다면, 그러니까 정부에서 원하는대로 재벌과 족벌 신문 등이 방송을
장악하게 된다면, 이러한 현상이 아무도 알 수 없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 말이다. 신경민 앵커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갔던 그 길이 바로 언론의 정도(正道)이며, 그가 바꾸거나 버릴 수 없다고 말했던
'꿈과 소망'(2008년 12월 31일 클로징 멘트)인 것이다.

중립성의 의미를 왜곡하지 말라

신문 시장을 장악하고 방송 진출을 호시탐탐 엿보던 족벌 언론들과 방송 진출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려 들던 재벌들은
아마 신경민 앵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불편하고 따가웠을 것이다. 그들과 긴밀히 교감하고 있는 청와대의 의중이야
다시 말해 뭣하랴. 하지만, 언론이란 그런 것이다. 언론이란, 본디 기득권에게 따갑고, 소외된자에게 따스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언론의 중립성이다. '한 편에서는 이러이러했고 한 편에서는 저러저러했습니다. 이상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중립을 빙자한, 언론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 해야 마땅하겠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신경민 앵커에겐 죄가 없다. 그는 언론인이 해야할 말을 했을 뿐이며, 그동안 기계적 중립성에
갇혀 지내던 다른 뉴스 앵커들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선례를 남겼다. 혹자는 '공영방송'의 앵커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
되겠냐고 이야기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MBC라는 공영방송의 앵커가 아니라면 과연 그런 말을 꺼낼 수나 있었을까?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대로 방송이 권력의 품에 안긴다면 과연 그러한 말을 조근조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이가 앵커자리에
앉을 수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신경민 앵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우리가 방송을 권력으로부터 지켜내야하는
이유이며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간다고 주장하시는 권력자들에게 한 마디 고해보고자 한다.
본디 듣기 불편한 조언이 진실로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듣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 조언이 나오는 구멍을
꽁꽁 틀어막아 그 상황이 조언을 얻을 상황이 아닌냥 행동하는 것은 코미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경민이라는 구멍을,
언론이라는 구멍을 막기에 앞서 과연 왜 이런 쓰디쓴 한 마디가 나오는 지에 대해 고민을 해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당신들에게 쓰지만 약이 되는 한 마디를 할 수 있는 모습, 그것이 바로 언론의 중립성이란 것이다. 착각하지 마시길.




덧붙여.
혹시 신경민 앵커의 교체가 그의 발언으로 인한 뉴스데스크의 낮은 시청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AGB닐슨이나 TNS미디어 따위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최근들어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이 가장 높았던 때가 인기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의 방영시기와 맞물리며, 그 이후로는 항상 고만고만한 시청률을 유지해왔다는 점을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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