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위기, 특히 한국 사회 특유의 가부장제를 골자로 하는 가족 제도에 위기가 도래한 것은 분명하다. 이혼율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결혼을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는 청년들은 점차 늘어만 간다. 여러 가지 이유로 출산을 거부하는 부부들이 생겨나는 것은 물론, 전통적 의미에서의 가족에 속하지 않는 1인 및 2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길게 보면 수백 년, 짧게 보면 수십 년을 연명해온 현재의 가족 제도가 변화를 위한 용틀임을 시작해야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원인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공고한 성과 같았던 가부장제 가족은 왜 붕괴하기 시작했는가. 첫 번째로 자유로운 개인의 등장 때문이다. 가부장제에서는 가족의 구성원 개개인 중 남성 가부장에게 힘이 집중되고, 그를 제외한 다른 구성원들은 일정 이상의 자유를 포기해야한다. 가족의, 가문의 안녕과 유지를 위해서는 심지어 위대한 가부장마저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이를 탐탁하게 여길 리 없다. 이에 더해 가부장제의 목표는 성씨의 대물림과 그를 통한 가문의 존속이다. 근대교육으로 등장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더 이상 가문의 존속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으며, 이에 기반을 둔 설득에 포섭되지 않는다.

 

가부장제 붕괴의 두 번째 이유는, 가부장제가 필연적으로 소수를 주변적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조부모-부모-자녀(특히 아들)로 이어지는 단단한 줄기를 기초로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이 사회에는 그 줄기의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존재한다. 게이-레즈비언 커플, 천애고아, DINK족 등이 바로 그들이다. 가부장제는 스스로를 정상의 범주에 두기 위해 필연적으로 이들을 주변부로 밀어내고 이들을 비정상적 존재, , ‘타자로 만든다. 가부장제 가족이 유일한 정상적 형태로 자리매김해야만 재생산과 성씨의 대물림을 통해 안정적 가문의 존속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원주의화 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이 매커니즘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결국 작금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대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 바로 <가부장제 2.0>이라는 아이디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이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준거집단으로써의 전통적 가족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 골자다. 이른바 전통적 가부장제와는 달리 가부장의 포용성을 더 높이되, 각각의 개인이 사회에 노출될 때 오는 불안정성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수백 년을 내려온 제사라는 전통 의식이 되고, 가족 구성원은 가족과 가문의 존속이라는 한 가지 방향성을 위해 그 스스로의 책무를 다 해야 한다.

 

수백 년을 내려온 체계의 장점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계승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 <가부장제 2.0>의 가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우리는 <가부장제 2.0> 역시 기존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기존 가부장제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부장제 2.0>에서도 최고의 가치는 가족, 더 나아가 가문의 존속이다. 현대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과연 이 봉건적 가치에 얼마나 찬동할 것인가. 애초에 각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문의 존속을 위해 자유를 희생할 준비가 돼 있었다면, 기존의 가부장제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전과 다른 포용적 가부장상()이 일부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체제의 한계는 분명하다.

 

<가부장제 2.0>이 대안이 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 역시 기존 가부장제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 , 주변부의 타자화를 여전히 막을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가족과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는 가족 내에서 재생산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기존 가부장제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부장제 2.0>이라는 체제 내에서도 이는 반드시 행해져야할 기본적 목표다. 따라서, 이 목표를 수행할 수 없는 집단은 자연스럽게 비정상적 가족으로 불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가부장제 2.0>이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고, 여러 지향점 중 하나의 선택 사항이 되면 타자화 문제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가부장제 2.0>이 일개 선택 사항으로 전락하면 그것만이 갖고 있어야 할 단 하나의 정상성이 상실되고, 자연스레 각 구성원들이 느낄 정상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안온함이 통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2.0>이라는 아이디어를 비난만 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이 붕괴되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개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따뜻한 마음에서 고안된 틀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는 결국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덮을 뿐이다. 옳지 않다. 사실 이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은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도전하고 이를 깨부수며 보다 올바른 대안을 찾아 헤매고 있다. 대다수가 전통적 가족제도에 기반 한 교육과정과 TV 프로그램 등으로 인해 잘못된 사회화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불합리한 계약을 참지 못해 파업하는 노동자를 무책임하다 비난할 수 없듯, 우리는 불합리한 결혼 제도를 깨려하는 구성원들을 무책임하다 비난할 수 없다. 비난의 화살은 이미 존속할 수 없음이 판명된 가족 및 결혼제도를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사회화하려드는 국가에게 돌려져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가 무너지며, 모든 것이 무너질 듯한 공포에 휩싸인 지금도 큰 흐름에서 보면 진정한 대안을 찾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 따라서 허점투성이의 섣부른 대안을 내어놓기보다는, 좀 더 큰 틀에서 사회 전체가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물론, 모두가 그저 손을 놓고 있자는 얘기는 아니다. 특히 국가의 보조적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국가는 전통적 가족이 수행했던 역할을 임시적으로 떠맡음으로써 구성원들의 고통 분담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은 가부장제에 기초한 가족제도를 정상가족인 것 마냥 홍보하려는 태도를 지양해야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하지만 붕괴하는 현 가족제도를 대체할 대안(대안은 단 하나일 수 없다)’은 반드시 자연스레 우리 앞에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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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laycouts/30142879409


주말이라 매우 글을 쓰기가 귀찮고 쓸 글이 밀려있음에도 불구하고 황대가 그린 컴퓨터 학원에서 학업마저 뒤로한 채 쓴 글을 보고 눈감을 수 없었기에 간단하게 몇 자 써본다.

 

기본적으로 국가의 강제라는 부분에 대한 개념 정의를 서로 다르게 하고 있었던 데에서 논쟁이 시작되지 않았나 한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 나와있듯 국가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 법치국가에서 헌법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기본적으로 국가에 의한 국민에 대한 통제프레임 전체를 완벽하게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애초에 문제가 됐던 것은 국가가 국민의 출산을 어떠한 방식으로 통제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보육수당지급, 양육여건 개선 등 간접적인 인센티브들은 사실상 국가에 의한 출산 장려. 하지만, 이런 간접적인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방식의 강제는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결코 실현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의 핵심이다.

 

논의의 초반에 황대는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출산이 필요하다면 국가의 구성원들이 그를 위해 출산에 대한 의무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나는 문제의 핵심이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는 세금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돈을 벌고, 그럴 기꺼이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세금으로 진상하는국민은 없다. 만약 국민의 의무가 직접적으로 국가의 존속을 향해있게 된다면 국가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고,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출산율의 저하에 있어 극단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에 대한 반감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국민국가를 기본단위로 살아가고 있는 현 상황을 감안할 때, 극단적 상황에서는 언제나 국가가 최우선 순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헌법 제37조 제2항에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함에 있어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는 없다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극단적 상황, 예컨대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쉬이 무시될 수 있는 부분이다.

 

황대가 나의 의견을 출산에 관한 부분은 신성한 부분이므로 무조건 let it be 해야한다라는 식으로 설명한 것은 왜곡이다. 결국 나 역시 출산에 대한 국가의 (간접적) 규제를 인정하며, 필요할 경우 이를 통해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출산의 선택이 개인의 자유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출산과 결혼 등이 국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의무이고, 그를 선택하지 않는 이를 국가가 규제한다면 게이, 레즈비언 등의 성소수자, 출산을 원치 않는 자들은 2등 시민으로 전락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국가는 어디까지나 국민들의 행복추구권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어야 하며, 앞서 이야기한 바 있듯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출산율의 저하가 국가 공동체를 당장이라도 침하시킬만한 사안이라면, 국가는 그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안(직접적 강제가 아닌)을 고심함과 동시에, 출산율 저하를 통해 올 국민들에 대한 불이익을 감소시킬만한 다른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만 할 의무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황대는 국가가 짊어져야할 이런 종류의 치열한 고민을 영화 매트릭스의 시스템에 비유했는데, 나는 오히려 국가의 존속이라는 절대 가치를 위해 출산이 강요되는 파시스트적 세계관이 매트릭스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이도 현 상황에서 국가의 존재와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가와 개인이 충돌할 때 어떠한 가치가 보다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가치에 인가에 대해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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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14일,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토마스 블랙(Thomas C. Black) 부학장이 Daniel Seon Woong Lee(타블로의 본명)의 학사 및 석사 취득을 학교 공식 트위터를 통해 인정하였다. 이로써 오랜 시간을 끌어왔던 힙합 그룹 에픽하이(Epik High)의 멤버 타블로의 학력 위조 논란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논란의 당사자인 타블로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그동안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이 겪었던 괴로움을 토로하며 당분간 '긴 휴식'에 돌입할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네이버 카페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cafe.naver.com/whathero)"와 디시인사이드 에픽 하이 갤러리(gall.dcinside.com/epikhigh)에서는 여전히 부학장의 인증만으로는 증거가 될 수 없다며 추가적인 논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학교 측의 공식적인 해명에도 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네티즌들의 반응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까.

학벌과 '뜨는 연예인'의 상관 관계


서울대 출신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겸 CF모델 김태희
(출처 : www.namooactors.com)

대한민국 사회는 학벌이 많은 것을 결정짓는 곳이다. 훗날의 직업, 자신이 속하게 될 계급, 앞으로의 성공 가능성 등 많은 것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갈린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일견 학벌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직업들조차 학벌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직업군 중 하나가 연예인이다.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연예인이 1차적으로 갖추어야할 덕목은 연기력, 가창력, 적합한 외모, 진행 실력등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만약 어떤 신인급 연예인이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내로라하는 대학을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소위 '뜰' 가능성이 생긴다. 대표적인 예로 데뷔당시 서울대에 재학 중이었던 연기자 김태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이로 알려지며 CF와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주가를 올려 현재 최고 스타의 반열에 올라있다. 그 외에도 그룹 UN의 멤버였던 김정훈, 클래지콰이의 멤버 호란, 가수 성시경 등이 학벌의 후광을 입은 연예인들이라 할 수 있다.

타블로 역시 이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타블로가 속한 에픽 하이는 2003년 그들의 1집 앨범을 출시하였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처음 타블로와 에픽 하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타블로가 출연한 '논스톱5' 라는 인기 시트콤과 그 O.S.T에 수록되었던 '평화의 날'이라는 곡 때문이었다. 힙합 음악이 점점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나가고 있던 당시 대중적 멜로디에 기반을 둔 에픽 하이의 음악은 크게 인기를 끌었고, 에픽 하이는 차례로 히트곡을 내며 인기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렇게 에픽 하이가 인기몰이를 하는 과정에서 리더인 타블로의 학벌이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방송과 신문 지상을 통해 미국의 유명 명문 사립대 중 하나인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하였다. 이는 타블로가 '천재'의 이미지를 갖게 되는데 큰 역할을 했고, 뛰어난 학업적 성취를 뒤로하고 음악 활동에 전념하는 그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후 타블로는 각종 TV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여 자신의 학창시절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자랑하며 그의 이미지를 더욱 공고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타블로 본인이 의도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과장된 표현이 있었고, 이는 후에 타블로의 학력 의혹을 증폭시키는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된다.


3인조 힙합 그룹 에픽하이
(출처 : www.woolliment.com)

학력 위조 논란, 왜 발생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블로가 실제로 스탠퍼드를 졸업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왜 이러한 논란이 발생되었냐는 것일 것이다. 타블로가 학력을 위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사람들에게 개연성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몇 년 전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 위조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예일대 측에서 신정아씨가 위조한 서류를 자신들의 공문이라고 인정했다 번복하는 해프닝이 벌어지며 한국 사회에서 미국 대학의 학력 검증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쌓이게 되었다. 또한, 이후 영화배우 장미희, 영화감독 심형래 등의 학력 의혹이 추가로 밝혀지며 문화예술계가 학력 의혹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확실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인기와 명예를 위해 학력을 위조하는 일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알게 모르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 화살이 타블로에게 돌아간 것인가? 그것은 타블로가 자신의 이미지를 고양하고 인기를 높이는 데 '학벌'이라는 자원을 적절하게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본 한 네티즌이 4년여 전부터 꾸준하게 타블로에 대한 의혹을 제기해왔고 이것이 다른 이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삽시간에 학력 논란이 이슈화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학벌을 이용해 인기를 얻는 것이 연예인들의 성공적 마케팅 수단인 동시에 곱지 않은 시선을 자아낼 수 있는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학벌과 관련해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흔히 SKY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이른바 '명문대'의 졸업생들은 한국 사회의 많은 기득권을 독점하고 있다. 단지 그런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취업, 승진, 결혼 등에서 불이익을 볼 수밖에 없는 곳이 이곳, 대한민국인 것이다. 또한, 점점 더 '개천에서 용이 나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에서 명문대 입학은 정치, 경제적 계급을 나누는 척도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명문대에 다니는, 혹은 졸업한 이들에 대한 부러움과 분노의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녀사냥을 그만두고 전체적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때

타블로의 학력이 논란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는 한국 대학 출신들에 비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탠퍼드 대학의 그것도 '석사' 학위는 찬란하게 반짝이는 것인 동시에 빛이 바라기 쉬운 것이었다. 함께 학교를 다녔던 동기들의 몇 마디 증언과 상황 증거면 충분할 학력 인증 절차(?)가 외국 대학의 경우 훨씬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사실상 타블로의 학력이 검증된 것으로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네티즌들은 Daniel Seon Woong Lee가 타블로와 동일 인물이 아닐 수 있다거나, 3년 반 만에 학사와 석사를 동시에 취득하는 것이 가능하냐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할 것은 좀 더 큰 맥락에서의 문제가 아닐까.

진정 우리가 문제 시 해야 할 것은 학력과 전혀 무관한 곳에서도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하는 학벌 사회 대한민국의 구조적 결함이다. 타블로가 정말로 스탠퍼드 대학을 나왔느냐 아니냐보다, 왜 그가 인기를 얻기 위해 '스탠퍼드 석사'를 팔 수 밖에 없었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결국 이런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계급이 학벌을 만들고 학벌이 계급을 재생산하는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를 청산해야만 한다. 물론, 이런 거시적인 담론의 논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개인의 노력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한 무력감을 느끼는 것도 일견 타당한 반응이다. 하지만 역시 큰 강은 작은 내가 모여 이루는 법이다. 많은 이들이 구조의 부조리에 주목하고, 그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때 조금씩이나마 사회는 변화해나갈 수 있다. 대중의 가면 뒤 숨어 타블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보다 학벌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고발하는 시민단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학력 위조 논란을 해결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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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억압적인 공안통치를 중단하라


우리는 작년 이맘때 이명박 정부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지 말고 촛불집회에서 표출된 국민들의 뜻을 국정운영 전반에 걸쳐 반영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지난 1년여 동안 국민들의 정당한 의사표현을 더한층 억압하고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훼손함으로써 사회 갈등을 증폭시켜 왔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국민들의 순수한 애도와 추모에 대해서조차도 폭력시위를 미리 막는다는 미명 하에 봉쇄와 통제로 대응하였다. 우리는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성취인 민주주의가 최근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는 현실에 심각한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주주의가 심대한 위기에 처해 있음은 사회 여러 영역에서 관찰할 수 있다. 국정운영의 기초인 인사는 법이 정한 임기와 절차를 무시함으로써 권력을 남용한 독재체제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국민의 반대에 아랑곳없이 권력통제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의 무력화를 시도함으로써 인권보장을 강화하는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의 언로를 틀어막는 사이버악법이나 언론독점의 우려 때문에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미디어관련법을 통과시키려고 입법전쟁을 불사해 왔다. 일부 소수의 폭력을 빌미로 다수 국민의 평화집회를 위한 광장을 원천봉쇄하고 마구잡이식 집회탄압을 노골화하여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라는 헌법적 명령을 훼손하고 있다. 또한 사회안전망의 구축에는 인색한 대신 소수의 부유층을 우선하는 조세 및 사회정책을 통해 다수의 국민을 경제위기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도 대안부재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지속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조정자 역할을 포기하고, 지난 10년 간 이루어 놓은 개성공단 등의 경제협력과 한반도 평화공존 노력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검찰, 경찰, 국세청, 국정원을 통한 공안통치가 강화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화의 성취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던 과거의 권력기관들이 본연의 기능에서 벗어나 정권유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여 국민의 일상적 인권을 유린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 민주주의가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여실한 증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자기들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하는 많은 국민들과 언론인들에 대해서는 엄정한 법 집행을 내세우면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국세청 조사와 검찰 수사 과정에 있어서는 자의적인 법 집행으로 일관하여 많은 국민들이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또한 검찰은 인명살상의 결과를 낳은 용산참사와 관련한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명령마저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초법적 권력으로서의 오만을 드러내었고, 심지어는 공정성과 독립성을 생명으로 삼아야 할 사법부마저 부당한 재판 개입을 통해 공작정치의 악습을 되살리고 있다.


우리는 과거 군사독재정권과의 오랜 싸움을 통해 이룩해온 민주화의 성취물들이 이처럼 일순간에 거품처럼 소멸되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이에 우리는 국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룩해 온 우리 사회의 기본가치인 자유와 민주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쇄신을 아래와 같이 촉구한다.


1.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의 위기를 초래한 현 시국에 대해 국민 앞에 진솔히 사과하고, 현 위기를 초래한 법무부장관을 포함한 내각의 전면적인 쇄신을 단행하라.


1. 정부와 국회는 검찰, 경찰, 국세청, 국정원 등 법집행기관의 권한남용을 척결하기 위하여 이들 기관의 제도개혁을 추진하라.


1. 정부는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소통될 수 있도록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언론 악법을 당장 철회하라.


1. 정부는 부유층 중심의 경제정책과 무분별한 국토개발정책을 포기하고 국민 다수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지속가능한 경제,사회정책을 수립하라.


2009년 6월 10일


민주주의의 회복을 열망하는 연세대학교 교수 일동

명단

강상현, 경규학, 고광윤, 고상백, 권구혁, 권상옥, 권수영, 권정승, 권주현, 김기정, 김광숙, 김도형, 김동노, 김상근, 김성보, 김성수, 김성태, 김영희, 김용민, 김왕배, 김종철, 김주영, 김주환, 김준환, 김 진, 김진수, 김창영, 김충선, 김태수, 김태환, 김하수, 김한성, 김현미, 김현주, 김현철, 김형순, 김호기, 김호범, 김희진, 나성원, 나윤경, 남 웅, 노의근, 노정선, 노중균, 도현철, 류상영, 문상영, 문정인, 문창옥, 박경자, 박기영, 박명림, 박명철, 박상영, 박재석, 방연상, 백경선, 백문임, 백영서, 백태승, 서 경, 서종범, 선우환, 설혜심, 손영종, 손창완, 송기원, 신동민, 신동빈, 심희기, 안순일, 엄영호, 양재진, 양정석, 양혁승, 염성수, 염유식, 오영교, 오홍석, 왕현종, 원재연, 유상현, 유 일, 유중하, 육종인, 윤민우, 윤세준, 윤태진, 윤혜준, 이광호, 이경원, 이기언, 이대성, 이도준, 이명민, 이병종, 이상길, 이상인, 이석구, 이석영, 이숙현, 이윤영, 이인재, 이재경, 이재길, 이제민, 이주삼, 이종수(법학), 이종수(행정), 이태호, 이혜경, 이희경, 임성래, 임성모, 임 걸, 임 일, 임중우, 장은미, 전광석, 전수연, 전지연, 전현식, 정경미, 정무권, 정민예, 정상철, 정승미, 정승화, 정운룡, 정원균, 정재현, 정종락, 정종훈, 정형일, 조대호, 조성원, 조재국, 조현수, 조혜정, 차혜원, 최건영, 최문규, 최선미, 최영애, 최윤오, 최종건, 최종철, 하일식, 한상훈, 한영균, 한인철, 한재원, 한재훈, 한종희, 허경석, 허경진, 현승준, 홍길표, 홍종일, 홍 훈, 황금중(총 162명)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 선언문을 시작으로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시국 선언 릴레이.

그저 내가 다니던, 그리고 좀 더 다녀야할 학교의 교수들이 이처럼 터트려주시니, 아무래도 마음이 더 설레고 와닿고 반갑다.

우리 과 교수들, 또 내가 수업을 들었던 교수들도 여럿 보이는 것이 더더욱 반갑고.... 아직 이 땅의 민주주의는 살아있구나.
고마워요 교수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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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이다. 그와 동시에, 현재의 대한민국은 '연애 공화국' 이기도 하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때를 잘못 만난 탓인지, 사람을 잘못 만난 탓인지 여러 사람들의 개탄 속에서도 빛을 잃어가는 판국이지만, 이 땅의 '연애주의'는 그러한 걱정에서 자유롭다.


 요즘의 이 사회에는, 그야말로 연애가 넘쳐흐른다. 비혼(非婚)인 이들에게는 그들의 나이, 상황, 여타 다른 조건들에는 아무런 고려 없이 연애가 권해진다. 심지어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의 아이들에게 '사귀는 친구 없냐?'고 묻는 것마저 어색하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20대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나이의 사람들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2말3초(2학년 말에서 3학년 초 사이까지 '솔로'면, 영영 연애를 하지 못한다는 속설)란 말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 전까지 누군가와 '커플'이 되기 위해 많은 대학생들이 기를 쓰고 노력한다. 또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 흔히들 '결혼 적령기'라고 부르는 - 사람들이 연애를 하지 않고 있다고 얘기한다면, 주위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주변인들을 소개시켜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는 진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다소 비꼬아 표현하자면, 모든 이들이 '연애교(戀愛敎)'라는 신흥종교에 경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 지경이다.



(Robet Doisneau 작(作). 출처 : Klimt-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http://klimt.cyworld.com)


연애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연애 자체를 폄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연애는 인간이 살아가며 만들어나가는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 자체로 살아가는 희망을 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이가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지금처럼 연애가 넘치다 못해 홍수를 이루며 세상을 휩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황이라 말하기 힘들다.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을 '연애를 쉰다'고 표현하며, '26년간 연애를 하지 못하면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한다.' 따위의 우스개가 방송을 통해 소개되곤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20대 초반의 이모씨는 “주위에서 왜 연애를 못하냐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고 얘기한다. 이처럼,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은 당사자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며, 연애를 하는 상황이 당연하게 '정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 땅의 '연애주의'는 연애하지 않는 자에게 유죄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연애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무엇이 많은 청년들을 연애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마, 이 부문에 가장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미디어일 것이다. 현재도, 공중파와 케이블을 망라한 수많은 TV채널에서 연애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MBC의 '우리 결혼했어요'는 가상결혼을 소재로 한 리얼 연애 버라이어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며, 얼마 전부터 실제 커플을 방송에 투입시킴으로써 연애라는 소재 자체를 프로그램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또한, SBS의 '골드미스다이어리' 같은 경우에도 출연자들의 맞선(소개팅)과 그에 이어지는 연애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예능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연애는 주요한 소재이자, 극의 목표 자체인 경우가 많다. 특히, 청년층을 타겟으로 한 작품에서,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연애를 하고 있거나 연애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극중에서 연애라는 상황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를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는 케이블까지 포함해, 수많은 연애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방송되었거나 방송 중에 있다. 가히, 연애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 포위되어 살고 있는 형국이라 해도 빈말이 아닐 정도다. 이처럼, 리모콘을 돌릴 때 마다 자연스럽게 연애가 우리를 휘감아 돌다보니, 연애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종의 생활양식이 되어버렸다. 그런 이유에서 연애를 하지 않는 상태는 무엇인가 결핍된 상태로, 연애를 하지 못하는 이는 무엇인가가 모자란 사람으로 비춰지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 연애시대 화보 . 출처 : http://tv.sbs.co.kr/yeonae/)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결핍 상태로 여겨져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연애는 누군가에게 희망이며 삶의 의미가 될 수도 있는 소중한 관계 맺기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연애중일 필요는 없으며, 그럴 가능성도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쌍방향의 관계로 발전하고, 그것이 연애로 이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지만, 현재 사회를 지배하는 연애 강박이 만들어내는 연애는 그러한 순리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 연애 중이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사람과도 애인 관계가 되고, 별다르게 느낄 이유가 없는 외로움을 단지 연애중이지 않기 때문에 느끼게 된다. 지금의 우리들을, 이 시대의 청년 솔로들을 사로잡고 있는 외로움은 '연애주의'로부터 비롯된 일종의 강박증일지도 모른다.


외로움. 연애 강박의 또 다른 이름


 자유로워져야할 필요가 있다. 아니,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더 이상 연애라는 절대 기준에 휘둘려 존재하지도 않은 자신의 결핍을 찾아 헤매이며, 존재하지도 않을 외로움을 달래야할 필요가 없다. 연애는 우리에게 선택이어야 한다.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연애라는 환상에 이 시대의 청년들이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움직일 필요가 없다. 자유롭게 연애하고, 자유롭게 연애하지 말아야 한다. 그 연애는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충족하면 족할 것이며, 타인의 기준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연애 공화국'의 주민이어서는 안 된다. 이 시대가 연애 강박으로부터 독립하는 그날, 민주주의의 재림만큼이나 절실한 그날을 조용히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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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안될거야, 아마.”


 얼마 전, 그룹 '타바코 쥬스'의 보컬 권기욱이 그가 소속된 루비살롱 레코드의 다큐멘터리 예고편에서 내뱉은 이 한 마디가 패러디의 소재 등으로 활용되며 인터넷 상에서 큰 화제를 뿌렸다. 네티즌들은 그의 자조적인 웃음과 시니컬한 대사에 열광하며 각종 패러디를 양산했고, 이것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처음 패러디물이 등장하기 시작한지 한 달여가 지난 지금도 그 기세는 여전하다. 스포츠, 정치, 사회 분야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패러디물들은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엇이 많은 이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했을까? 단지, 권기욱이란 이가 표현한 방법이 주는 재미가 네티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뿐일까. 대학생 김모군은 패러디물들을 보며 느낀 감상을 묻는 질문에 “그 것(패러디물)을 보면서 웃음이 난다는 상황이 참 슬펐다.” 라며, “무엇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페이소스(비애감)가 느껴졌다.” 라고 답했다.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단순히 재미라는 측면에서만 이 현상을 보는 것은 핵심을 비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디씨뉴스)


재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 있어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 사이에 청년 취업자 수는 50여만명이 감소하였고, 청년층의 비경제활동 인구 비율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2008년 현재 55.2%에 달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취업자로 집계되는 이들 중 대다수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되어 있고, 비경제활동 인구 중 많은 수가 자발적이지 않은 실업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청년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자조적인 한숨을 내뱉을 만한 상황이다.


 청소년들의 경우도 역시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자사고, 특목고에 대한 공약들이 남발되고, 국제중 등의 설치가 확정되면서 많은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부터 무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시사IN의 보도(89호)에 따르면 서울 강남 소재의 모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 현재의 꿈으로 서울대(명문대) 진학을 꼽은 아이들이 응답자 26명 중 7명에 달했으며, 현재 소망하는 것이 국제중 ․ 특목고 진학이라 대답한 아이도 17명 중 4명이나 됐다. 아이들의 '꿈이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다. 초중고 학생들은 전국의 또래 아이들을 일렬로 세우려는 욕망의 발로인 일제고사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었고, 그에 반대해 체험학습을 권유하였던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아야했다.


고립무원 상태에 있는 청년, 청소년층


 모든 것이 어렵게만 돌아가는 현 상황의 절정이라 할 만한 것은 5월 23일, 토요일 아침에 전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었다. 정치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검찰의 저인망식 수사에 의해, 그 너머에 있는 현 정권의 국면 전환에 대한 의지에 의해서였다. 그로 인해, 생활인으로 돌아가려 했던 전임 대통령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 자조감의 절정인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의 안타까운 마지막을 슬퍼하는 이들이 그동안 쌓여왔던 암울한 기운을 긍정의 에너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대한문 앞의 시민 분향소를 만든 것도, 봉하마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발길도, 서울 광장을 가득 메운 노란 두건과 넥타이 차림의 모습도 모두 이대로 주저앉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우린 안될거야, 아마.”는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로 바뀌었고, 자꾸 나빠만 지는 현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문과 분노를 품게 만들었다.


부정의 에너지가 긍정의 에너지로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어렵다. 미래를 펼쳐 가야할 청년들과 청소년들에겐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우린 안될거야, 아마.”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고 느낀 이들이 분연히 일어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들의 각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감히 그의 '선물'이라 할만하다.

 

 처음 시작될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권기욱의 한마디는 꾸준히 인터넷 상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언젠가부터 자조적이고 무기력한 투의 패러디들보다는, 신랄하게 현실을 비꼬는 것들이 눈에 띄는 것이 반갑다. 마지막으로, 여러 사람들을 시원한 기분에 젖게 해주는 듯한 한 작품(경찰청장 버전)을 소개하며 이 글을 갈무리 하려한다.


“내가 요즘 로봇수사대 K캅스를 보고 있는데, 느낀게...

존나 열심히 시민들을 위해야 할 거 같아.

그런데 우린 열심히 패버리잖아?

우린 안될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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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고인이 된 아버지가 소떼를 몰아 방북하여 남북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튼 것을 까맣게 잊어먹은 탓인지, 이 상태로 가느니 개성공단을 포기해야한다는 논지의 발언을 했던 정몽준 의원님께서 또 한 번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펴주셨다. 정 의원님 가라사대 "노 전 대통령의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고인이 바라는 국민 화합에 맞지 않는 것(경향신문 5월 26일자 7면)“이란다. 정신이 번쩍 뜨이는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기에 앞서 비극적인 사실 자체에 슬퍼하던 이들조차 정신이 번쩍 뜨여 손바닥을 딱 소리나게 맞부딪칠 지경이다.

 아무래도 이전의 발언이 그러하듯, 자신의 차기 대선주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앞장서서 이런 발언을 하시는 모양이다. 확실히 다른 이들에 비해 부각돼 보이니 일정부분 그분의 의도가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현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의 차기 대선주자 중 한 명 이라면, 자신의 보수적 색채를 선명히 눈에 띄게 하는 것이 앞으로의 발디딤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번엔 좀 갈 길을 잘 못 드셨다.


(가수 비와 함께. 출처 : 정몽준 의원 팬클럽 홈페이지 : http://www.mj21.org/)


대선주자로서의 선명성 강화? 글쎄 이건..


 두 사람이 싸웠다. 한 사람은 지금의 동네 이장과 친한 청년회장이고, 한 사람은 전임 이장이다. 청년회장은 현 이장과 전 이장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걸 눈치 채곤 이장 등 긁어주는 심정으로 전임 이장을 마구 때렸다. 전임 이장은 이유야 어찌됐든 자신이 맞은 일이 너무나 분하고 원통해서 한참을 고민하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온 마을이 추도의 분위기로 가득한데, 옆에서 차기 이장을 노리는 마을 유지가 침을 눈에 찍어 바르며 얘기한다. 안타깝지만 지난 일이니, 다 잊고 다시 한 번 잘 살아보자고.


 만약, 마을 유지의 말대로 그저 다 잊고 잘 살아보자며 전임 이장의 죽음을 덮어버린다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먼저, 차분한 마음으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한 뒤에,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구조적 원인을 찾아보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청년회장이 마을 이장의 비위를 맞추려 했던 걸까. 혹시, 청년회가 이장의 뜻대로 좌지우지 되는 조직은 아니었는가. 전임이장이 그러한 이유 때문에 청년회를 마을 유지들과 심지어 자신의 손에서부터도 독립시키려 했던 것은 아닌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하지 않겠는가.


 혹여나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 중 한 분이신 정몽준 의원님을 기껏 마을 유지에 빗대 얘기하였으니 무슨 불호령이 떨어지랴 하고 누군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국회의원을 벌써 이십 년이 훌쩍 넘게 역임하고 계신 분께서 그리 쩨쩨하진 않으시겠지. 그런 의미에서 한 마디만 더 던져 보려한다.

 

정몽준 의원님. 정신 차리소서!

 정몽준 의원님. 진심으로 차기 대권을 생각하신다면 자신이 속한 집단의 허물을 덮으려만 하지 말고 반성하는 법을 배우시는 게 어떠할까요? 제 짧은 소견으로 감히 말씀드리자면, 무리한 발언으로 보수적 색채를 강화하려 드시는 것보다는, 반성할 것은 반성하자는 솔직한 태도가 오히려 의원님의 앞날에 더 도움이 될 듯합니다. 물론, 온 동네를 뒤집어엎는다는 확인되지 않은 약속의 힘을 빌지 않고는 자신의 앞마당을 떠난 곳에서 국회의원 한 자리 하기 어려우신, 본인 자신의 좁은 역량을 키우시는 일을 선행하셔야 하겠지만요.

 



 

 이상의 졸렬한 글을 6선에 빛나는 국회의원이자 집권 여당 최고위원이신 정몽준 의원님과,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자꾸 그분을 죽음으로 내몬 사항을 따지다보면 또 다른 원망과 사회혼란이 커질 것”(경향신문 5월 26일자 7면)이라며 정 의원님께 힘을 보탠 한나라당 김성태 의원님께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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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여대에서 특강중인 이소연씨 copyright by 경향신문)

 5월 12일, 이소연씨가 서울여대가 마련한 '미래를 여는 지성 아카데미' 특강에 '떴다'. 그는 세계에서 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우주의 드넓은 품에 안겼던 그야말로 역사적인 인물이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한국 우주사에 길이 남을 흔적을 남긴 이답게 지구로 귀환한지 1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이곳저곳의 행사와 방송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여대에서 기획한 이번 특강도 그런 행사 중 하나인 듯싶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여성' 재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성공담을 설파했다. 그는 고교 이후에 남자들에 둘러싸여 생활해오다보니 여대가 매우 낯설다며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고 20여년을 산 것 같다”고 운을 뗀 후, “자신이 여자니까 차별당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면 이미 패배자”라며, “자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잊고 사는 게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당차게 밝혔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자신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임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이면 성공할 수 없다?


 유교 사상이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수치상이나 질적으로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공과 동일시되는 고위직 공무원이나 기업 CEO의 경우 여성의 존재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다. 이소연씨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 받으려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에 임하라는 의미로 발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말에서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이 사회가 여성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고 있으며,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남성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남성들은 오히려 그들의 남성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그들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긍정함으로써 사회생활의 성공 루트를 만들어나간다. 자신의 가족과 인간관계를 제쳐두고 자신의 조직 단합대회에 참석해 의리를 지키는 '사나이'는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한두 걸음 앞서고 있는 이를 이르는 또 다른 말이지 않은가? 하지만 여성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남성적 가치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에 맞춰(혹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거쳐 가는 군대 문화에 맞춰) 최적화 돼 있는 이 사회에서 여성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그들의 삶의 궤적을 상당부분 남성들의 문화에 맞춰야만 한다. 술자리에 참석해 남자 직원들의 비위를 맞추는 '꽃'이 되거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마저 잊고서 '명예남성'이 되어 남자 직원들의 음담패설에 맞장구를 치는 역할을 마다해선 안된다는 거다.

꽃이 되거나, 남자가 되거


 이소연씨의 이야기는 '일' 측면에 한정되어 있는 것인데 왜 그렇게 확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만 잘하면 과연 성공할 수 있느냐고. 물론, 업무 면에서만 뛰어나도 일정 이상의 인정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뛰어난 업무능력에 국한된 이들은 '일벌레'라며 조롱받기 일쑤이지 않은가. 특히 여성이 뛰어난 일처리 능력으로 단연 돋보인다면, 이른바 '독한 여자' 취급 받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다. 결국, 사회에 진출한 여성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느냐, 사회적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버리느냐의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시대의 '사나이'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하는 것인데 말이다.

 

 사실, 이것은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성들 중에서도 흔히 이야기되는 '사회 부적응자', 다시 말해, '가짜 사나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들 역시 능력 여하와 상관없이 이른바 '사회생활'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그런데, 그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상사가 부르면 재빨리 뛰어나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음날의 근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동료들과의 우정(?)을 나누는 것이 과연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일까. 그 조직의 구성원들을 괴로움으로 내모는 것이 진정 ,'사회생활'이라 할 수 있는가? 결국,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회생활을 강요하는 이 사회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이소연씨 : http://blog.daum.net/rlawogur119)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전가해선 안돼


 이소연씨는, 여자라는 이유로 어려운 일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면서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심리에 대해 일갈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은 그러한 일들에 대해 당당하게 맞섰으며, 결국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른바 '성공한 사람'으로서, 성공하기위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버렸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얘기해서는 안된다. 다른 이들에게 성공을 위해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라고 얘기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것은, 성공이란 열매를 위해 이 사회의 여성들만이 치러야 하는 기회비용을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왜곡된 사회구조를 인식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 선행된다면 성공할 수 있다며 이 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가려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소연씨는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고, 그저 한 명의 '한국사람'으로 생각해달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성공한 여성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가 포기한 것들을 다른 이들도 포기하라고 무책임하게 말하는 대신, 그가 여성으로서 성공하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후배들이 포기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틀로 똑같은 조건을 강요하여 많은 이들을 괴롭게 하고 탈락시키는 사회 대신에, 다양한 이들이 모여 그들의 다양성을 지키며 진정으로 조화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것. 그것이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이 해야 마땅한 일이며,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일 것이다.




관련 기사 :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121801265&code=100203

※ 따옴표로 처리되어 있는 이소연씨 발언은 모두 상기 기사에서 따온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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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라는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다니엘(Liam Neeson)이 아들인 샘(Thomas Sangster)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해 묻는다.

"니가 좋아하는 그녀.... 혹은 그가(she or he)......."

놀랍게도, 아버지는 아들이 좋아하는 이가 여자라고 특정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당연하게도 만드는 사람과 만들어지는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 2003년 즈음의 영국에서는

최소한 이성애가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었으며, 개인의 성적 취향을 부모님조차도 자연스레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영국이 매우 특이한 나라라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동일한 비율을 이루며 살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저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내재화 하고 있었을 뿐이지 않을까? 그런데 왜,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일까?


이성애자로 만들어지는 사람들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는 이성애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법칙이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남자)아이에게는 '좋아하는 남자(여자)친구' 가 있을 거라 미루어 짐작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애인'이라는 말은 성별에 따라 '여자(남자)친구' 라는 말로 간단히 치환된다. 인기몰이를 하는 남자(여자) 배우에겐 어떤 여자(남자) 배우가 이상형인지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물어보며, 만약 그 배우가 동성애자라면 그러한 질문이 곤란하고 껄끄러울 것이라는 고려는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어떠한 사람이 서울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얘기를 풀어놓는데 알고 보니 서울 외 지역의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또, 비흡연자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주는데 맞춰 신나게 수다를 떨었더니, 그 상대방이 흡연자라면 얼마나 민망할까. 똑같은 가정인데, 어찌하여 동성애자에 대한 고려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일까? 왜, 동성애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받아야 하는 걸까?


여러 가지 추정치들이 난무하고 있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내의 동성애자가 1500만명에 이르러 미국 내 아시안 인구

(1200만명)를 추월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또한 스페인, 캐나다,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등에서는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있으며, 미국 내 몇 개 주에서도 동성 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약 3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동성애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우리 주위의 100명 중 6명 정도가 동성애자라는 의미다. 이는 인천광역시 인구(272만 2786명)와 비슷한 수준이다(2008년 1/4분기 기준). 당연하게도 이 숫자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

동성애자는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되는 걸까?



                                                              (영화 '후회하지 않아'의 스틸 컷.)

호모포비아가 지배하는 사회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동성애자가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큰 이유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동성애자 스스로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성향을 밝히기가 어려운 사회 풍조의 탓이 클 것이다. 그 편견을 총체적으로 종합해보자면, 동성애자는 잠재적 성병 보균자이며, 문란한 성생활을 즐길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애정을 표현하여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사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말이 되지 않는 얘기다. 동성애자들의 성애(性愛)를 통해 에이즈 등의 바이러스가 생겨난다는 믿음은, 중세 이전의 사람들이 벌레가 먼지에서 생겨난다고 믿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성애를 생각하며 바로 성교(性交)를 떠올리지 않듯, 동성애 자체가 문란함으로 여겨지는 것도 분명한 오해이며 오류다. 또한, 동성애자들이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라는 믿음은 순진한 자기애의 잘못된 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시쳇말로 도끼병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찬찬히 들여다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편견들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가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의 경우,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에 당황을 느끼며 그에 대한 포용에 대해 고민을 하게 마련인데, 모두가 이성애자라고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 동성애라는 극도의 이질성은 포용의 범위를 넘어서는 '공포'로써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증)의 정체다.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를 희망하며


만약, 모든 이들이 똑같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모두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 같은 직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며, 유사한 음식을 먹으며 별반 다를게 없는 사랑을 펼쳐나간다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지 않는가? 이러한 숨막히는 상황을 해결해줄 열쇠가 '다양성'이다. 4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의 수와 같은 40억 개의 삶이 우리 주위엔 존재하며 그 중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와 온전히 같을 수 없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성애와 동성애로 굳이 나누어 생각하는 것도, 이 '다양성'이라는 틀에서 보면 그저 우스운 일일 뿐이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그저 사랑의 한 방식일 뿐이며, 우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를 건강하게 지켜나갈 의무가 있는 이들로서, 다른 이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만 한다.


인간이 본래 이성간의 결합을 전제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지금 본인의 생활 방식 중 원래 인간이 만들어진 방식대로인 것이 몇이나 되는지에 대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문인 가상의 틀을 만들어놓고 그것이 절대불변의 진리인냥 떠받들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올바른 일일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식활동을 통한 자손번식을 하지 않으면 의미를 잃어버릴 만큼 단순한 존재였나? 앞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40억 개의 삶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이유에 대해 누구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모든 일을 자신의 기준에만 맞춰서 생각하는 것은 편협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성애자가 , 모든 소수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한 모 연예인이 지극히 이성애자를 중심으로한 컨셉의 '막장' 케이블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의문이 들어 그에게 왜 그 방송에 출연하는 지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그의 답변은 참 슬펐다. 그는 '자신이 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고 얘기했다. 그랬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케이블과 공중파를 통틀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 한 그에게 손을 내미는 곳은 몇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막장' 이든, '이성애 중심의 컨셉' 이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 사회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다는 것이 이렇 듯 모진 결과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 대부분은 모두 다 어떤 부분에서는 소수자(비 기득권자)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수도권 외 출신이라면, 비명문대 재학생이라면 각각 남성에 대해, 수도권 출신에 대해, 명문대 재학생에 비해 소수자라 할 수 있다. 이성애자에 대해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동성애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소수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된다면, 동성애자가, 모든 소수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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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기본은 중립성이다. 중립을 잃은 언론은 말의 길을 좌우하는 그 고유의 역할을 실행해낼 역량을 잃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한 언론인께서 '언론인의 길은 항상 외롭다'라는 취지의 얘기를 하신 것도 아마
뼈가 시릴 정도로 중립을 지켜야하는 그들의 사명에 대한 것이 아니었겠나 싶다. 우리가 언론인 출신으로
잠시간의 유예도 없이 정치권으로 흡수되는 폴리널리스트(언론인 출신의 정치인)를 비난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중립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애매한가? 세상을 좌와 우, 선과 악으로 쉽게 분할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중간의 영역을 콕 찝어내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설사, 그 중심점을 짚어낼 수 있다고 해도, 그 지점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과연 '중립' 일까? 힘이 센 자가 9할이고 그렇지 못한 자가 1할일 때, 1할의 편에 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언론의 중립이다. 정치권력, 자본권력을 포함한 각종 권력에 굴하지 않고, 해야할 말을
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언론의 중립성이라 부른다.

신경민. 낙마하다.

2009년 4월 13일.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MBC뉴스데스크를 진행해온 신경민 앵커가 마지막 방송을 했다.
언젠가부터 MBC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자 김미화씨와 함께 교체 대상자로 검토되어오다가
최종적으로 교체가 확정된 것이다. 보통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방송을 계속 하는 것이 관례지만, 신경민 앵커는
13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뉴스데스크 진행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동안 많은 보수 매체에서 신경민 앵커의 언행을 비판해왔다. 청와대에서도 역시 그의 언행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이번 신경민 앵커의 교체는 겉으로는 "뉴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것(엄기영 MBC 사장)"이지만 사실상
보수 매체와 청와대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 기정 사실이다. 과연 그가 어떠한 이야기를 해왔기에
자신의 자리를 내놓아야 할 처지에 이러른 것일까?


(신경민 앵커)

신경민.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이번 보신각 제야의 종 분위기는 예년과 달랐습니다.
각종 구호에 1만여 경찰이 막아섰고요.
소란과 소음을 지워버린 중계방송이 있었습니다.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언론, 특히 방송의 구조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시청자들이
새해 첫날 새벽부터 현장실습교재로 열공했습니다.


이것이 2009년 새해 첫 뉴스데스크의 후미를 장식했던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였다. 이것 외에도 그의 많은 언행은
기존 딱딱한 말투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위의 멘트만 내뱉어대던 앵커에 익숙한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누가 뭐라해도, 새해가 시작되며 TV를 통해 전해들려왔던 박수소리와 각종 음향효과들은 그 당시 현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숨기기 위한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당시 언론 파업을 이끌던 이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만약 언론을 정치 권력이나 자본 권력에게 넘겨준다면, 그러니까 정부에서 원하는대로 재벌과 족벌 신문 등이 방송을
장악하게 된다면, 이러한 현상이 아무도 알 수 없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 말이다. 신경민 앵커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갔던 그 길이 바로 언론의 정도(正道)이며, 그가 바꾸거나 버릴 수 없다고 말했던
'꿈과 소망'(2008년 12월 31일 클로징 멘트)인 것이다.

중립성의 의미를 왜곡하지 말라

신문 시장을 장악하고 방송 진출을 호시탐탐 엿보던 족벌 언론들과 방송 진출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려 들던 재벌들은
아마 신경민 앵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불편하고 따가웠을 것이다. 그들과 긴밀히 교감하고 있는 청와대의 의중이야
다시 말해 뭣하랴. 하지만, 언론이란 그런 것이다. 언론이란, 본디 기득권에게 따갑고, 소외된자에게 따스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언론의 중립성이다. '한 편에서는 이러이러했고 한 편에서는 저러저러했습니다. 이상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중립을 빙자한, 언론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 해야 마땅하겠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신경민 앵커에겐 죄가 없다. 그는 언론인이 해야할 말을 했을 뿐이며, 그동안 기계적 중립성에
갇혀 지내던 다른 뉴스 앵커들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선례를 남겼다. 혹자는 '공영방송'의 앵커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
되겠냐고 이야기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MBC라는 공영방송의 앵커가 아니라면 과연 그런 말을 꺼낼 수나 있었을까?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대로 방송이 권력의 품에 안긴다면 과연 그러한 말을 조근조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이가 앵커자리에
앉을 수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신경민 앵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우리가 방송을 권력으로부터 지켜내야하는
이유이며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간다고 주장하시는 권력자들에게 한 마디 고해보고자 한다.
본디 듣기 불편한 조언이 진실로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듣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 조언이 나오는 구멍을
꽁꽁 틀어막아 그 상황이 조언을 얻을 상황이 아닌냥 행동하는 것은 코미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경민이라는 구멍을,
언론이라는 구멍을 막기에 앞서 과연 왜 이런 쓰디쓴 한 마디가 나오는 지에 대해 고민을 해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당신들에게 쓰지만 약이 되는 한 마디를 할 수 있는 모습, 그것이 바로 언론의 중립성이란 것이다. 착각하지 마시길.




덧붙여.
혹시 신경민 앵커의 교체가 그의 발언으로 인한 뉴스데스크의 낮은 시청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AGB닐슨이나 TNS미디어 따위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최근들어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이 가장 높았던 때가 인기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의 방영시기와 맞물리며, 그 이후로는 항상 고만고만한 시청률을 유지해왔다는 점을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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