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토로 한 '살인의 추억' 포스터)

군포 대학생 살인사건의 후폭풍이 여전히 거세다. 초기에 용의자 강호순의 신상명세며 각종 신변잡기에 쏟아지던 관심은
청와대가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용산 참사를 숨기도록 지시했다는 문건이 등장하며 또 다른 국면을 맞게됐다.
이제 그러한 문건이 존재한다 아니다의 여부는 논란이 끝이 난 모양이고, 그 문건이 과연 개인적인 불찰이냐, 아니면
청와대로부터 영향을 받은 권고의 하달이냐를 두고 공방이 치열하다. 정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후자 쪽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결과가 어찌되든 군사독재 시절의 여론 통제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곧 개봉을 앞둔 영화의 제목이 머리를 스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뭐라나.

이런 사회를 들썩이는 논란을 일으키는 군포 대학생 살인사건에 대해 필자는 조금 다른 견해에서 논의를 진전시켜보고자
한다. 어쩌면 필자가 사용하는 '군포 대학생 살인사건'이라는 통상적이지 않은 이름에서 이미 의도를 눈치 챈 이도 있을 지
모르겠다.

씨프린스호 사고 vs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논의를 진전시키기에 앞서 먼저 '이름짓기'의 위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이름을 짓는 것에는 마땅히 이름을
짓는 사람의 의도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최근 용산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이름 짓기만 해도 그렇다. 철거민의 과격한
시위가 사건의 원인이라 보는 이들은 '도심 테러', '용산 철거민 사태' 라 부르고, 경찰의 과도한 진압이 원인이라
보는 이들은 '용산 참사', '용산 철거민 살인집안사건' 이라 부른다.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사건의
본질이 다르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씨 프린스호 사건을 겪었던 여수 주민들이 태안에서 방제 활동을 벌이는 모습. 출처 : 연합뉴스)

이와 비슷한 예로 '씨프린스호 사고'와 '태안 기름 유출 사고'에서 드러난 작명 의도를 들 수 있다. 95년 여수 앞바다에서
발생한 '씨프린스호 사고'는 최근 발생한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자주 비교될 만큼 해양 생태계와 인근 해안의 주민들
에게 재앙으로 다가온 사건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분명 비슷한 사건인데 전자는 당시의 사고 선박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후자에는 사고 선박의 이름은 쏙 빠지고 사고가 난 인근 지역의 지명만이 나타나 있다.
덕분에 태안 사고의 선박 이름이 허베이호이고, 허베이호가 현대의 소유이며, 삼성중공업 소유의 크레인과 충돌하며
기름 유출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태안 기름 유출 사고'라는 이름에서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사고의 이름이
'의도적'으로 지어진 것인지, 우연히 그리 된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작명 기법'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군포 여대생 살인 사건 vs 군포 대학생 살인 사건

자. 이제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보자. 군포 보건소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 대학생이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연쇄 살인범은 남자였고, 대학생은 여자였다. 그리고 그에 대해 이렇게 이름 붙인다 '군포 여대생 살인 사건' 이라고.
여기서 하나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만약 이 사건이 '군포 대학생 살인 사건' 이라 이름 붙여졌으면 어땠을까?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대학생이다. 그렇다면 사실 '군포 대학생 살인 사건'이라고 이름 붙여도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라 생각된다. 왜일까?

한국 사회에서 대학생은 철저하게 행동하는 자였다. 민주 항쟁의 주인공이고,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을 주는
젊은 피였다. 하지만 여자 대학생은 어떠한가? 여대생은 항상 당하는 자였다.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촛불 시위에서 쓰러진 채 폭행당하는 존재였으며 연쇄살인의 표적이 되는 대상이었다. 그렇다. 여대생은 대학생이기
이전에 여자였으며, 이 사회의 남자들이 보호해야할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명쾌해진다.
왜 살인 사건의 이름 짓기에 '대학생', 이 아니라 '여대생'이라는 단어가 쓰이게 됐는지.


(영화 '아는 여자' 스틸 컷 중에서)

수동성의 이름으로 그들을 가두지 말라

남교수란 말은 없어도 여교수라는 말은 자주 쓰인다. 일반 남자 중고등학교는 결코 'OO남고'라는 식으로 이름이 지어지는
법이 없지만 대부분의 여자 중고등학교는 'OO여중, OO여고'라는 식으로 이야기 된다. 남대생이란 말은 대학생으로 대치
되지만, 여대생은 결코 대학생이라는 말로 완전히 대치될 수 없다.

이름을 짓는 행위에는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어떠한 의도가 담기게 마련이다. 특히 '여자'라는 이름의 수식어는 어떠한
대상을 수동적이고 소수의 힘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는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비교적 진보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언론의 인터뷰에서도 대학생 OO군과 여대생 OO양은 자주 구분이 되곤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 여자라는 이름을 수동성의 틀에 가두어서는 안된다. '군포 여대생 살인 사건' 이라는 이름 짓기는 자연스레
"연약한 여성을 죽인 연쇄살인마를 홍보해 가난한 서민의 죽음을 묻으려고 한 범죄행위(민주당 서갑원 부대표 - 2009년
2월 26일자 경향신문(4면) 보도 중에서)" 라는 담론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며, 여성이라는 존재를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할
유약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우리는 여대생이 쓰러진 채 폭력을 당했기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한 인격체가 무참한 공권력에
짓밟힌 것에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꽃다운 여대생이 연쇄 살인범에게 살해되었기에 분노하기보다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삶의 권리를 무참히 빼앗겼다는 데 분노해야한다.
언젠가 여교수라는 말이, 여대생이라는 말이 어색하게 다가올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생각을 가두는 그 수동성의 틀을 부숴버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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