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잡설2009. 5. 20. 15:52
 전형적인 모범생의 삶을 살아온 나에게 가네시로 가즈키의 책은 묘한 일탈을 꿈꾸게 한다. 언젠가부터 읽으려고 쳐박아두었던 SPEED를 꺼내어 읽은 것도 내 삶의 탈찰구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 권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오카모토 가나코'의 모습을 나와 겹쳐보게 되는 것은 왜일까. 단지 그와 내가 성별이 다를 뿐 살아온 삶의 궤적이 유사해서일까? (물론 난 그가 그랬던 만큼 사회에 마냥 순응적이기만 했던 일반적 의미의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유사성에 나오는 것이든, 아니면 그저 내가 그렇게 느낌으로써 통쾌함을 맘껏 즐기려 하기 때문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 어쨌든 책을 다 읽고 난 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리만큼 시원해졌으니까.

 그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접한 것은 GO. 그다음이 연애소설, 그다음이 레볼루션 No.3 였다. 이제 SPEED 까지 읽어내었으니, 마지막으로 플라이 대디 플라이 정도. 혹자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한국어판이 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양억관, 김난주 부부에 의해 재해석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나로서는, 일어판을 직접 읽어볼 수 없으니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난 가네시로 가즈키의 팬이라기보다는 양억관, 김난주의 팬일 뿐일까? 사실, 어느쪽이든 큰 상관은 없지만. 점점 다가오는 바깥세상으로부터의 압박에서부터 잠시나마 나를 구제해준 가네시로 씨에게, 혹은 김난주 - 양억관 부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언젠가 또 팍팍한 기분이 들 때, 마지막 남은 카드인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꺼내들며 또다시 감사하게 되었으면 한다. 기분 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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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여대에서 특강중인 이소연씨 copyright by 경향신문)

 5월 12일, 이소연씨가 서울여대가 마련한 '미래를 여는 지성 아카데미' 특강에 '떴다'. 그는 세계에서 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우주의 드넓은 품에 안겼던 그야말로 역사적인 인물이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한국 우주사에 길이 남을 흔적을 남긴 이답게 지구로 귀환한지 1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이곳저곳의 행사와 방송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여대에서 기획한 이번 특강도 그런 행사 중 하나인 듯싶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여성' 재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성공담을 설파했다. 그는 고교 이후에 남자들에 둘러싸여 생활해오다보니 여대가 매우 낯설다며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고 20여년을 산 것 같다”고 운을 뗀 후, “자신이 여자니까 차별당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면 이미 패배자”라며, “자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잊고 사는 게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당차게 밝혔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자신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임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이면 성공할 수 없다?


 유교 사상이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수치상이나 질적으로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공과 동일시되는 고위직 공무원이나 기업 CEO의 경우 여성의 존재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다. 이소연씨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 받으려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에 임하라는 의미로 발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말에서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이 사회가 여성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고 있으며,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남성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남성들은 오히려 그들의 남성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그들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긍정함으로써 사회생활의 성공 루트를 만들어나간다. 자신의 가족과 인간관계를 제쳐두고 자신의 조직 단합대회에 참석해 의리를 지키는 '사나이'는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한두 걸음 앞서고 있는 이를 이르는 또 다른 말이지 않은가? 하지만 여성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남성적 가치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에 맞춰(혹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거쳐 가는 군대 문화에 맞춰) 최적화 돼 있는 이 사회에서 여성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그들의 삶의 궤적을 상당부분 남성들의 문화에 맞춰야만 한다. 술자리에 참석해 남자 직원들의 비위를 맞추는 '꽃'이 되거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마저 잊고서 '명예남성'이 되어 남자 직원들의 음담패설에 맞장구를 치는 역할을 마다해선 안된다는 거다.

꽃이 되거나, 남자가 되거


 이소연씨의 이야기는 '일' 측면에 한정되어 있는 것인데 왜 그렇게 확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만 잘하면 과연 성공할 수 있느냐고. 물론, 업무 면에서만 뛰어나도 일정 이상의 인정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뛰어난 업무능력에 국한된 이들은 '일벌레'라며 조롱받기 일쑤이지 않은가. 특히 여성이 뛰어난 일처리 능력으로 단연 돋보인다면, 이른바 '독한 여자' 취급 받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다. 결국, 사회에 진출한 여성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느냐, 사회적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버리느냐의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시대의 '사나이'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하는 것인데 말이다.

 

 사실, 이것은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성들 중에서도 흔히 이야기되는 '사회 부적응자', 다시 말해, '가짜 사나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들 역시 능력 여하와 상관없이 이른바 '사회생활'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그런데, 그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상사가 부르면 재빨리 뛰어나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음날의 근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동료들과의 우정(?)을 나누는 것이 과연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일까. 그 조직의 구성원들을 괴로움으로 내모는 것이 진정 ,'사회생활'이라 할 수 있는가? 결국,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회생활을 강요하는 이 사회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이소연씨 : http://blog.daum.net/rlawogur119)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전가해선 안돼


 이소연씨는, 여자라는 이유로 어려운 일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면서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심리에 대해 일갈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은 그러한 일들에 대해 당당하게 맞섰으며, 결국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른바 '성공한 사람'으로서, 성공하기위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버렸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얘기해서는 안된다. 다른 이들에게 성공을 위해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라고 얘기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것은, 성공이란 열매를 위해 이 사회의 여성들만이 치러야 하는 기회비용을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왜곡된 사회구조를 인식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 선행된다면 성공할 수 있다며 이 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가려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소연씨는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고, 그저 한 명의 '한국사람'으로 생각해달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성공한 여성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가 포기한 것들을 다른 이들도 포기하라고 무책임하게 말하는 대신, 그가 여성으로서 성공하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후배들이 포기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틀로 똑같은 조건을 강요하여 많은 이들을 괴롭게 하고 탈락시키는 사회 대신에, 다양한 이들이 모여 그들의 다양성을 지키며 진정으로 조화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것. 그것이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이 해야 마땅한 일이며,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일 것이다.




관련 기사 :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121801265&code=100203

※ 따옴표로 처리되어 있는 이소연씨 발언은 모두 상기 기사에서 따온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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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라는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다니엘(Liam Neeson)이 아들인 샘(Thomas Sangster)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해 묻는다.

"니가 좋아하는 그녀.... 혹은 그가(she or he)......."

놀랍게도, 아버지는 아들이 좋아하는 이가 여자라고 특정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당연하게도 만드는 사람과 만들어지는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 2003년 즈음의 영국에서는

최소한 이성애가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었으며, 개인의 성적 취향을 부모님조차도 자연스레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영국이 매우 특이한 나라라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동일한 비율을 이루며 살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저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내재화 하고 있었을 뿐이지 않을까? 그런데 왜,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일까?


이성애자로 만들어지는 사람들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는 이성애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법칙이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남자)아이에게는 '좋아하는 남자(여자)친구' 가 있을 거라 미루어 짐작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애인'이라는 말은 성별에 따라 '여자(남자)친구' 라는 말로 간단히 치환된다. 인기몰이를 하는 남자(여자) 배우에겐 어떤 여자(남자) 배우가 이상형인지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물어보며, 만약 그 배우가 동성애자라면 그러한 질문이 곤란하고 껄끄러울 것이라는 고려는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어떠한 사람이 서울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얘기를 풀어놓는데 알고 보니 서울 외 지역의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또, 비흡연자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주는데 맞춰 신나게 수다를 떨었더니, 그 상대방이 흡연자라면 얼마나 민망할까. 똑같은 가정인데, 어찌하여 동성애자에 대한 고려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일까? 왜, 동성애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받아야 하는 걸까?


여러 가지 추정치들이 난무하고 있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내의 동성애자가 1500만명에 이르러 미국 내 아시안 인구

(1200만명)를 추월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또한 스페인, 캐나다,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등에서는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있으며, 미국 내 몇 개 주에서도 동성 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약 3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동성애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우리 주위의 100명 중 6명 정도가 동성애자라는 의미다. 이는 인천광역시 인구(272만 2786명)와 비슷한 수준이다(2008년 1/4분기 기준). 당연하게도 이 숫자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

동성애자는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되는 걸까?



                                                              (영화 '후회하지 않아'의 스틸 컷.)

호모포비아가 지배하는 사회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동성애자가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큰 이유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동성애자 스스로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성향을 밝히기가 어려운 사회 풍조의 탓이 클 것이다. 그 편견을 총체적으로 종합해보자면, 동성애자는 잠재적 성병 보균자이며, 문란한 성생활을 즐길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애정을 표현하여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사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말이 되지 않는 얘기다. 동성애자들의 성애(性愛)를 통해 에이즈 등의 바이러스가 생겨난다는 믿음은, 중세 이전의 사람들이 벌레가 먼지에서 생겨난다고 믿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성애를 생각하며 바로 성교(性交)를 떠올리지 않듯, 동성애 자체가 문란함으로 여겨지는 것도 분명한 오해이며 오류다. 또한, 동성애자들이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라는 믿음은 순진한 자기애의 잘못된 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시쳇말로 도끼병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찬찬히 들여다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편견들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가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의 경우,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에 당황을 느끼며 그에 대한 포용에 대해 고민을 하게 마련인데, 모두가 이성애자라고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 동성애라는 극도의 이질성은 포용의 범위를 넘어서는 '공포'로써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증)의 정체다.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를 희망하며


만약, 모든 이들이 똑같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모두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 같은 직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며, 유사한 음식을 먹으며 별반 다를게 없는 사랑을 펼쳐나간다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지 않는가? 이러한 숨막히는 상황을 해결해줄 열쇠가 '다양성'이다. 4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의 수와 같은 40억 개의 삶이 우리 주위엔 존재하며 그 중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와 온전히 같을 수 없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성애와 동성애로 굳이 나누어 생각하는 것도, 이 '다양성'이라는 틀에서 보면 그저 우스운 일일 뿐이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그저 사랑의 한 방식일 뿐이며, 우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를 건강하게 지켜나갈 의무가 있는 이들로서, 다른 이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만 한다.


인간이 본래 이성간의 결합을 전제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지금 본인의 생활 방식 중 원래 인간이 만들어진 방식대로인 것이 몇이나 되는지에 대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문인 가상의 틀을 만들어놓고 그것이 절대불변의 진리인냥 떠받들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올바른 일일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식활동을 통한 자손번식을 하지 않으면 의미를 잃어버릴 만큼 단순한 존재였나? 앞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40억 개의 삶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이유에 대해 누구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모든 일을 자신의 기준에만 맞춰서 생각하는 것은 편협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성애자가 , 모든 소수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한 모 연예인이 지극히 이성애자를 중심으로한 컨셉의 '막장' 케이블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의문이 들어 그에게 왜 그 방송에 출연하는 지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그의 답변은 참 슬펐다. 그는 '자신이 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고 얘기했다. 그랬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케이블과 공중파를 통틀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 한 그에게 손을 내미는 곳은 몇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막장' 이든, '이성애 중심의 컨셉' 이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 사회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다는 것이 이렇 듯 모진 결과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 대부분은 모두 다 어떤 부분에서는 소수자(비 기득권자)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수도권 외 출신이라면, 비명문대 재학생이라면 각각 남성에 대해, 수도권 출신에 대해, 명문대 재학생에 비해 소수자라 할 수 있다. 이성애자에 대해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동성애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소수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된다면, 동성애자가, 모든 소수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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